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엘 파사레야 (문단 편집) === 국가대표 경력 === 그의 첫 [[FIFA 월드컵]]은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이었다. 당시 1978년 월드컵 이전의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참담했다. 자국 내에 독재 정부가 들어와 계엄령을 선포하며 아르헨티나의 사회 분위기는 살벌했다. 국민들은 [[군사정권]]에 대해 불만감을 품기 시작하고 독재를 했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비델라]] 정부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관심을 돌리게 할 기회를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침 그 때 열린 자국에서의 월드컵이다. 비델라는 월드컵이 열리기 무려 3년 전부터 자국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금지시키고 [[발렌시아 CF|발렌시아]]에 있던 [[마리오 켐페스]]는 임대료까지 쓰며 자국으로 복귀시켜 연습을 시켰고 홈 버프의 효과는 과연 있을지 궁금했다. 참고로, 당시 [[프란츠 베켄바워]]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 몇몇이 군사정권에 반대하며 참가를 아예 거부했다.[* [[요한 크루이프|크루이프]]는 가족 납치 때문에 충격을 받아 불참했다.] 파사레야는 25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주장 완장을 차고 참가한다. 비델라는 사실 본선에서 [[승부조작]]에 까지 관여했다. 아르헨티나는 조별예선에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는데, 헝가리와 프랑스를 심판 매수로 아주 얍삽하게 이긴다. 헝가리와의 경기에서는 2명이나 퇴장당했고, 헝가리 감독은 '''"심판이 열 두 번째 선수 같았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새 발의 피였고, 2라운드에서야 비로소 승부조작의 정점을 콕 찍었다.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은 2승 1무로 경기를 모두 마친 반면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는 1승 1무로 아직 한 경기를 남겼을 때였다. 남은 한 경기는 페루와의 경기였고, 어차피 이 경기에서 이겨도 [[승점]]이 동점이기 때문에 골득실이 좋은 브라질이 올라가게 되었다.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를 상대로 네골 차이로 승리해야 했다. 이 때 비델라는 손을 썼고, 경기 상황이 안 좋던 페루 정부에게 3만 5천톤의 곡물과 5천만달러를 무상 지원 해 준다. 경기는 6:0으로 아르헨티나의 승리였다.[* 참고로 페루는 지금이야 남미 내에서도 중위권 수준으로 추락한 초라한 팀이지만, 당시에는 만만한 팀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1라운드에서 강호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도 꺾고 1위로 올라온 팀이기에 의혹 제기는 계속 됐다.] 그렇게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만났다. 결승에서는 [[마리오 켐페스]]의 두 골로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자국의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이렇게 승부조작으로 얼룩진 지저분한 대회에 파사레야는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하지만 대회 때 아르헨티나가 우승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일등공신이다. 파사레야가 있었기에 당시 아르헨티나는 든든한 수비와 더불어 뛰어난 파사레야의 후방 공격 전개로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만일 파사레야가 없었더라면 아르헨티나의 우승도 없었을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다니엘 파사레야 1.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15%, #ABDDED 15%, #ABDDED 29%, #FFFFFF 29%, #FFFFFF 43%, #ABDDED 43%, #ABDDED 57%, #FFFFFF 57%, #FFFFFF 71%, #ABDDED 71%, #ABDDED 85%, #FFFFFF 85%)" {{{#000000,#e5e5e5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파사레야'''}}}}}}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파사레야는 주장 완장을 차고 참가했다. 이번엔 진짜 순전히 자신들만의 힘으로 조별예선 1라운드에서 2승 1패로 올라온다. 파사레야는 [[엘살바도르 축구 국가대표팀|엘살바도르]]와의 경기에서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공격진은 당시 최고였다. 지난 우승의 주역 [[마리오 켐페스]]와 신예 [[디에고 마라도나]]가 버티는 최고의 공격 듀오, 거기에다 후방의 파사레야까지... 그러나 2차 리그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와 한 조가 되었고, 두 경기에서 모두 패배해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 징크스|허무하게 2차 리그에서 탈락하고 만다]]. 사실 1982년 당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 중이였다. 때문에 선수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빠져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가기만 하면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서만 묻는 기자단에 둘러싸여 하루종일 방에서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래도 1라운드에서 그런 호성적을 거둔 것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도 파사레야는 이탈리아전에서 [[프리킥]] 골을 넣는 등 활약했고, 수비력 역시 좋았고, 파사레야만큼은 실력이 진짜배기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예선에서 본선 진출을 이끄는 결승골을 넣는 등의 활약으로 이번에도 대표팀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부상으로 인해 벤치를 지키면서 [[디에고 마라도나|마라도나]]와 함께 뛰는 일은 없었다.[* 당시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이후 새로 부임한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는데, 나이가 많이 든 파사레야에서 이제는 마라도나에게로 서서히 주축이 기울어지는 터라... 게다가 [[오스카 루게리]] 등의 활약으로 파사레야의 공백을 메우게 되면서 결승까지 무난히 진출했기에 파사레야는 조명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결국 대회 내내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마지막 월드컵에서 우승이라도 맛보며 국가대표에서 행복하게나마 은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